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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잘못된 언행, 모범생 자녀도 비행청소년으로 만든다?

 

 

생애 처음 경찰서 찾은 168명 분석
방문 잠그고 “공부나 해” 윽박 지르는 부모… 가출-절도 위험 높아
“TV속 저 인간 재수 없어” 욕설 퍼붓는 부모… 분노조절장애 가능성

 

 

 

 


3일 경기도의 한 경찰서 형사계 상담실. 명문대 진학을 꿈꾸는 김모 양(19·고3)과 유명 대학교수인 그의 부모가 형사 앞에 나란히 앉았다. 김 양은 백화점에서 3만 원대 분홍색 립스틱을 훔쳐 이곳에 왔다. 부모는 다짜고짜 “부족함 없이 큰 아이”라며 “내년에 서울대에 입학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가 물건을 훔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김 양은 입술을 꽉 다문 채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형사가 부모를 내보내고서야 김 양은 입을 열었다. “24시간 감시카메라가 설치된 방 안에 갇혀 사는 기분이었어요. 성적이 떨어지면 수시로 방문을 걸어 잠그는 엄마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김 양은 ‘감옥’이 돼 버린 집을 나와 평소 갖고 싶었던 물건을 훔친 것이다.

 

 

 

 


 

동아일보와 청소년 상담치료 기관 마인드힐링연구소는 지난해 3월부터 최근까지 학교와 가정에서 절도, 폭력, 게임중독, 자살 시도 등의 문제를 일으켜 생애 처음 경찰서를 찾은 청소년 168명의 심리상담 내용을 분석했다. 그 결과 문제를 일으킨 아이 뒤에는 성공만 지향하거나 사회에 불만이 가득한 미성숙한 부모가 있었다는 결론을 6일 도출했다. 공부 잘하고, 교우관계가 원만한 학생이라도 부모의 잘못된 언행에 따라 한순간에 절도·폭력의 가해자, 자살·게임중독의 당사자가 될 수 있었다.

 

심리상담 결과 TV 모니터나 이웃을 향해 욕하는 부모의 모습을 자주 봤다고 답한 학생은 168명 중 118명으로, 이들은 공통적으로 상대의 말에 쉽게 모욕감과 수치감, 열등감을 느끼는 분노조절장애 증세를 보였다. 부모의 과격한 언어습관이 촉매로 작용한 것이다. 중학교 2학년 최모 군은 3월 뾰족한 필기도구와 주먹으로 같은 반 친구의 눈과 입을 찌르고, 때렸다. 이유는 단지 ‘웃는 모습이 싫어서’였다. 그는 심리치료에서 “TV를 보며 ‘저렇게 생긴 인간들은 재수 없어’, ‘세상에 쓸모없는 인간들’이라며 욕하는 부모의 모습을 자주 봤다”고 털어놓았다.

 

부모의 우울·불안심리도 아이들의 마음을 병들게 했다.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거나 가출해 폭력, 절도를 저지른 학생 76명은 가정에서 “짜증 난다”, “살기 싫다”는 부모의 말을 자주 들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한 적이 있는 이모 양(17)은 “부모는 항상 피곤해 보였고 사소한 물음에도 쉽게 짜증을 냈다”며 “엄마의 ‘살기 싫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 자살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윤재진 마인드힐링연구소 대표는 “부모가 삶에 대한 불만과 부정심리를 그대로 표출하면 아이의 정서 파괴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자녀와의 대화를 소홀히 한 부모 아래서 자란 아이들은 게임중독에 빠지기 쉬운 것으로 나타났다. 168명 중 게임중독에 빠진 52명은 부모와의 평균 대화시간이 하루 30분 이내였고, 맞벌이 가정의 자녀가 상당수였다. 밤늦게 귀가한 부모로부터 받는 질문은 “밥은?”, “학원은?”이 전부였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채팅이 가능한 게임에 빠졌다. 우모 군(16)은 “무심한 표정의 부모에게 내 관심사를 얘기하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했다”며 “대화하고 싶어 게임을 했다”고 말했다.

 

지나치게 좋은 성적을 강요하는 것도 자녀의 절도, 학교 폭력을 유발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168명 중 28명은 성적이 떨어지면 가정에서 죄인 취급을 받다 평소 갖고 싶은 물건을 훔치거나 자신보다 공부 잘하는 경쟁자를 괴롭히는 폭력성을 보였다. 윤 대표는 “부모의 강압적인 교육방식이 아이들을 절도, 자살, 분노라는 감정에 무감각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정작 대부분의 부모는 경찰의 심리상담을 거부했다. 전체의 11.3%인 19명의 부모만 상담을 받았다. 나머지는 “우리 집 일에 무슨 상관이냐”는 식으로 상담을 거부하거나 비행의 원인을 아이의 정서적 문제로만 치부했다. 김은주 강남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우울과 불안장애를 앓고 있는 부모들은 자녀에게 폭력적, 가학적인 언행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며 “부모 스스로 자신을 먼저 되돌아보는 것이 아이 치료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김단비 기자 kubee08@donga.com
[기사출처_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