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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세상속으로/좋은 글 & 아름다운 시

인간관계에는 직선이 없다?


원칙 집착해 ‘고쓰’ 되는 당신
아이러니와 유머가 우리를 구하리

가끔 TV 드라마를 보면 어쩜 그리도 상황을 재미있게 묘사하는지 작가들의 표현력에 감탄하는 때가 있다. 딸과 대화하다 어느 드라마에서 나온 ‘고쓰’(고퀄리티 쓰레기의 줄임말)라는 단어를 썼더니 깔깔거리며 웃는다. “나도 모르는 단어를 엄마가 어떻게 알아?” 하고.

그런데 ‘고쓰’라는 표현이 참 재미있다. 외모나 재능이나 가진 것은 그야말로 고퀄리티인데 절대적 이기주의에 다른 사람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자기가 세상에서 최고인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 그래서 내심 “아우, 이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고 부르짖게 만드는 상대를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다. 


● 안하무인이 먼저 넘어진다

더욱이 실제 그런 사람들을 주변에서 가끔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공감하는 신조어가 아닌가 싶다. 예를 들어, 높은 사회적 지위에 중후한 외모여서 당연히 매너도 갖췄을 것 같은 남자인데 상대가 여자면 무조건 반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식당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에게는 당연히(!) 함부로 행동한다. 그들은 대체로 요즘 사람들이 ‘갑을 관계’니 뭐니 해서 흥분하는 것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의 행동이 잘못됐다는 것을 처음부터 모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한자 ‘갑’(甲)이라는 글자에 이미 그 이미지가 있다는 점이다. 갑은 애초에 떡잎을 뜻하는 글자로, 초목의 싹이 씨 껍질을 머리에 인 채 땅 밖으로 돋아나온 모양을 본뜬 것이다. 그처럼 처음 세상에 나왔으니 눈에 보이는 것이 없고 안하무인이고 자기가 최고라고 여길 수밖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꼴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어린 강아지들한테서 그런 면을 발견할 때가 있다. 집에서 키우는 개가 장가가서 새끼들이 태어났다. 생후 두 달 때 데리고 왔는데 이 녀석들이 오자마자 세 살 된 개한테 마구 덤비는 것 아닌가. 개가 기가 찬듯 받아주었더니 더욱 안하무인으로 밥그릇까지 뺏는 모습을 보고 박장대소한 적 있다. 

한편 ‘을’(乙)이란 글자는 그렇게 돋아나온 싹이 산전수전 거쳐서 넝쿨처럼 자라나는 모양을 나타낸다. 그래서 을은 어떠한 위기에도 살아남는 생명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 불필요한 백 마디는 없다

문제는 안하무인인 사람들이 삶의 위기 앞에서 넘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는 점이다. 그런 사람들은 정신의학적으로 검사하면 자기 의지력과 결정력을 상징하는 자율성은 매우 높으나 공감·배려·공정함을 상징하는 연대감이 매우 낮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느 기업 임원이 “나는 말을 조리 있게 못하는 사람을 보면 참을 수 없다”며 상담을 청해왔다. 뭐, 그런 게 문제랴 싶지만 당사자가 그 일로 심각한 분노와 공격성을 경험하면 분명 문제였다. 더욱이 그는 부하직원들이 조금이라도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더듬으면 보고서를 내던지곤 해서 난장판이 따로 없다고 했다. 물론 상대방이 긴장해서 그럴 거라는 생각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무조건 자신이 세워놓은 가이드라인에 맞아야 했다.

하지만 우리가 열 사람을 만나도 정말 내 마음에 드는 한두 사람을 만나기 힘든 것이 세상 이치다. 백 마디 말을 나누어도 그중에서 쓸모 있는 말은 한두 마디에 불과하다. 그 한두 마디를 얻기 위해 내가 필요 없다고 여기는 백 마디 말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어느 사람은 칭찬에 인색한데 그 이유가 자기는 객관적으로 칭찬할 거리가 없으면 절대 칭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인간관계가 몹시 힘들고 사람들이 다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는 것까지 비슷했다.


● 판단을 멈추고 네가 되자

이런 유형일수록 고지식한 원칙주의자가 많아서 유연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린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다. 유연성은 마치 물과 같아서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꼭 필요한 요소다. 창의성이 가장 활발한 시기인 어린아이들을 보면 몸만 유연한 것이 아니라 마음도 유연하다. 아무리 나쁜 환경에서도 아이들은 즐거움을 찾아낼 줄 안다. 그러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몸과 마음의 유연성이 떨어진다. 

마음의 유연성이 떨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다. 생각이나 경험의 폭이 제한된다. 당연히 창의성도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분노가 증가한다. ‘나라면 안 할 행동을 왜 저 친구는 하는가? 그리고 감히 나에게 다른 의견을 제시해? 내 의견을 무시해?’라고 생각할수록 분노는 커진다. 

반대로 마음이 유연하면 마치 흐르는 강물처럼 변화에 적응하기 쉽다. 물의 습성을 생각해보라. 물은 자신의 모습을 고집하지 않는다. 주위 환경에 맞춰서 스스로를 변화시키며 그 상황에 가장 맞는 모습을 만들어낸다. 물 같은 유연성을 가지면 우린 삶이나 인간관계에서 많은 부분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다.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이나 감정을 비난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다. 

반대로 유연하지 못하고 자신만의 원칙주의나 흑백논리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삶의 아이러니를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계획을 세워도 그 사이에 전혀 엉뚱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 인생이란 사실도 못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완벽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개 자신의 ‘고퀄리티’에 자부심이 가득 찬 사람들이 그런 함정에 빠진다. 그러나 인생이란 아이러니와 변수의 집적이 아니던가. 그런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우린 어떤 변화에도 적응할 수 있다.

유연성이 모자라는 사람들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지나치게 세부적 논리에 집착하고 질서와 규칙에 얽매인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남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일에 매우 민감하다. 이러한 경직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않는 훈련이 필요하다. 무엇이나 판단하기 시작하면 유연성을 잃어버리게 돼 있다. 

만약 비판하고 판단하고 싶거든 딱 1분만 생각을 멈춰보자. 그 생각이 스쳐 지나가게 내버려두자. 이 훈련을 거듭하면 판단의 잣대를 들이댈 만한 일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보는 훈련도 필요하다. 

유연성이 모자라면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 유연성 없는 사람들이 인간관계에서 자주 갈등을 일으키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작은 실수에도 비난만 하거나 늘 이편의 잘못을 꼭꼭 집어내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은 나름대로 치밀하고 진지하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방이 보기에는 단지 공감과 배려 능력이 부족할 뿐이다. 만약 그런 문제로 인간관계가 삐걱거리면 상대방의 처지가 되어볼 필요가 있다. 흔히 하는 비유대로 상대방의 모카신을 신고 1마일을 가보기 전에는 그에 대해 말할 수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 유머도 훈련하기 나름이다

유연성이 모자라는 사람들의 또 다른 특징은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꼭 필요한 요소는 유머 감각이다. 유머 감각은 훈련해서 되는 게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순발력도 알고 보면 훈련하기 나름이다. 요즘 인터넷 덕분에 꽤 괜찮은 유머를 많이 건진다. 유머 감각을 키울 여지가 있는 것은 다 섭렵해서라도 나름대로 순발력을 익힐 필요가 있다. 인생에서 그보다 도움되는 것은 그다지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어느 건축가의 말처럼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관계도 자연의 일부다. 직선으로 이어지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그런데 직선이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데서 갈등이 생겨나고 ‘갑질’도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유연성이란 바로 ‘인간관계란 직선이 아니다’라는 인식의 밑거름이 되는 요소가 아닌가 싶다. 


양창순 마인드앤컴퍼니 대표·신경정신과 전문의
[기사출처_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