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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세상속으로/드라마

공유는 월등했고, 김은숙은 탁월했다?



‘쓸쓸하고 찬란하神-도깨비’(극본 김은숙)는 케이블채널 tvN의 10주년 특별기획이다. 올해 초 ‘응답하라 1988’로 열었고, 든든하게 허리를 받힌 ‘시그널’에게서 “2016년을 잘 마무리하라”며 이어받은 부담스러운 바통이다. ‘상속자들’을 집필하며 ‘왕관의 무게를 견디라’던 김은숙 작가에게도 이 바통의 무게는 만만치 않았을 법하다. 하지만 6회까지 방송된 ‘도깨비’를 바탕으로 짐작하건데, 김 작가에게 그 무게를 거뜬히 견딜 내공이 쌓여 있었다. 도깨비에게 신통방통 방망이가 있었다면 김 작가에는 펜이 있었던 셈이다. 본디 마법의 펜은 아니었겠지만 김 작가가 잡는 순간 그 펜에는 마법에 걸렸다.

‘도깨비’가 주목받는 이유는 ‘탈피’다. ‘파리의 연인’ 이후 승승장구하던 김 작가의 화두는 단연 ‘재벌’이었다. ‘시크릿가든’, ‘상속자들’로 이어지는 그의 작품 속에는 항상 돈 많고 매력이 철철 넘치는 남자 주인공과 그의 품조차 박차고 나갈 강단을 가진 여자 주인공이 있었다. 둘 사이에는 숱한 벽이 있었지만 사랑으로 그 벽을 여지없이 허물었다. 그리고 김 작가가 펼쳐놓은 촘촘한 판타지 그물에 여성팬들은 여지없이 꽁꽁 매달렸다. 

또 한 가지는 ‘캐릭터’다. 김 작가의 작품에는 확고한 캐릭터가 있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재력, 내 여자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줄 아는 남자, 결코 돈에 굴종하지 않는 여자, 그리고 ‘서브’라는 수식어는 뻥 차버릴 만한 차고 넘치는 매력을 발산하는 주변인들. 자신의 작품에 출연하는 모든 이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것이 김 작가의 마법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탈피’일까. ‘도깨비’는 로또 당첨번호를 미리 맞추는 능력까지 갖추고 대저택에 살지만 재력에 초점을 맞추는 않는다. 재벌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맞다. ‘도깨비’는 재벌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도깨비’는 여전히 매력적인 캐릭터들로 가득 찼다. 하지만 기존의 공식을 탈피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스토리가 훨씬 더 풍부해졌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종잡을 수 없기에 더 끌린다. 도깨비가 구해준 임산부의 딸이 지은탁(김고은)이라는 설정은 도깨비와 도깨비 신부의 만남을 자연스럽게 이었고, 그를 데려가려던 저승사자(이동욱)가 허탕을 친 후 ‘아홉수’인 9세, 19세, 29세 때마다 지은탁이 저승사자와 마주칠 수밖에 없다는 설정은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그리고 저승사자와 써니(유인나)의 이야기에는 슬그머니 도깨비 김신(공유)이 무신으로 충성을 바치던 시절 그의 누이 동생으로 추정되는 왕비(김소현)의 사연을 버무린다. 씨실과 날실이 질서있게 엮이는 순간이다. 도깨비 신부를 만나 가슴에 꽂힌 칼을 빼는 것이 이야기의 완성일 줄 알았는데, 이 스토리는 6부 안에 가뿐히 제쳐버렸다. 

소소하게 등장하는 에피소드도 허투루 배치하지 않았다. 해외로 입양된 뒤 가정폭력에 시달리다가 뛰쳐나오는 아이를 달래 들여보낸 후, 오랜 시간이 지난 뒤 할아버지가 돼 죽음을 맞게 된 그 아이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주는 도깨비, 응급실에 실려 온 이는 살려냈지만 정작 자신은 과로사로 죽게 된 의사를 인도하는 저승사자의 이야기는 가슴 한 켠을 먹먹하게 만든다. 단순한 재미를 넘어 메시지를 담았지만, 김 작가는 결코 그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는다. 보고 느끼는 시청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영리한 구성이다.

그리고, 김 작가의 전매특허인 웃음도 빠지지 않는다. 식탁을 앞에 두고 포크와 나이프를 날리며 기싸움하는 도깨비와 저승사자의 싸움은 시종일관 흥미롭다. 939년을 살았지만 920세 어린 지은탁 앞에서 부끄러움과 민망함에 몸서리치는 도깨비는 충분히 귀엽고 사랑스럽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다가 “한 번만 안아주겠다”는 저승사자를 향해 칼을 뽑아 드는 도깨비(사진)의 모습은 어떤가. 김 작가는 확실히 고수다.

고수의 대본을 소화하는 배우 역시 고수이기에 ‘도깨비’는 빛난다. 2000년대 가장 트렌디한 작품으로 손꼽히는 ‘커피 프린스 1호점’을 진두지휘했던 공유가 연기하는 도깨비 김신은 팔색조다. 진지한 눈빛과 말투로 삶과 죽음에 대해 논할 때는 진짜 939년쯤 살아온 듯한 느낌을 풍긴다. 하지만 지은탁 앞에서 “내가 니 남자친구”라고 뜬금없는 고백을 한 후 어쩔 줄 몰라 숨을 곳을 찾는 모습은 마치 소년 같다. 

공유의 매력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우선 외모. 상상 속 도깨비의 이미지는 고이 접어 묻어둬도 좋다. 훤칠한 키로 각종 슈트와 코트를 자유자재로 소화하는 공유를 보고 있노라면 일단 눈이 즐겁다. ‘첫 눈에 반한다’는 말이 있듯 공유는 ‘도깨비’를 보는 시청자들의 시선을 단박에 붙들어 놓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연기. 김 작가의 드라마에 대한 남녀 시청자들의 반응이 엇갈릴 때가 적잖다. 많은 남성들이 “간지럽다”며 판타지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도깨비’의 김신은 남성들도 호감을 느끼는 캐릭터다. 939년이라는 삶은 그에게 기쁨보다는 아픔, 상보다는 벌이었다. 그런 인생의 나이테가 쌓인 김신에게서는 ‘수컷의 향기’가 난다. 가슴에 꽂힌 칼을 뽑으려 하지만 지은탁을 향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고민에 빠지는 김신에게 여성들이 열광한다면, 억겁의 삶을 끝내고 싶은 고단하고 쓸쓸한 김신의 모습에는 남성들도 연민을 느낀다. ‘도깨비’의 외피는 ‘로맨틱 코미디’지만, 내피는 ‘밀도높은 정극’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양극단의 연기를 소화하는 배우 공유가 있다.

마지막은 그의 목소리다. ‘도깨비’에는 내레이션이 많다. 오직 목소리의 힘으로 감정을 전달해야 하는 쉽지 않은 작업이다. 특히 김인육 시인의 ‘사랑의 물리학’을 읊조리는 그의 내레이션은 ‘도깨비’의 백미로 꼽힌다.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없이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지은탁을 향한 김신의 마음을 이보다 확실히 설명할 방법이 있을까? 그 어려운 걸, 공유가 해냈다.


안진용 기자 realyong@munhwa.com
[기사출처_문화일보]